[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20〉신용의 탄생
[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20〉신용의 탄생
  • 현재욱 선임기자 (jeffhyun@naver.com)
  • 승인 2019.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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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신용의 탄생

역사는 송나라의 교자를 최초의 지폐로 기억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화폐, 즉 신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화폐의 기원은 3,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질은 종이도 금속도 아닌 점토였다.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유적지에서 출토된 점토판에는 “아밀미라는 이 문서를 소지한 사람에게 추수 때 보리 330되를 준다”라는 문장이 쐐기문자로 적혀있다.

이 점토판은 ‘아밀미라’라는 사람이 발행한 약속어음이다. 보리 330되를 받을 사람을 특정인이 아니라 ‘점토판 소지자’라고 명시한 것은 이 약속어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당좌수표 혹은 양도성예금과 다를 게 없다. ‘아밀미라’ 대신에 은행 이름을 적어 넣으면 점토판은 곧바로 은행권이 된다.

은행권, 즉 현대 사회의 지폐는 지폐 소지자에게 무엇인가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이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만 원짜리 지폐를 보자. 이 지폐에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 담겨 있다. ‘이 지폐를 소지한 사람은 시장에서 만 원 상당의 재화 또는 서비스와 지폐를 교환할 수 있다.’

물론 그 약속이 구체적인 문장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저 만 원(10,000원)이라는 숫자와 일련번호가 찍혀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그 약속을 신뢰한다. 동네 가게에서 라면 다섯 봉지를 사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면 가게 주인은 군말 없이 거스름돈을 내어준다. 약속의 주체는 지폐에 인쇄된 세종대왕이 아니라 한국은행 총재다.

우리는 왜 일면식도 없는 한국은행 총재의 약속을 믿는가? 그 뒤에 국가(정부)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국가의 신용이 지폐에 찍힌 숫자를 보증한다. 그리고 국가의 신용은 국가의 구성원인 시민이 화폐 시스템에 동의함으로써 형성되었다. 만약 시민이 국가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부터 화폐는 잉크 묻힌 종이 쪼가리가 되어버린다. 구소련이 해체될 때처럼 담배가 화폐를 대신할 수도 있다.

“이 증서를 가져오면 증서에 적힌 금액에 상응하는 물건을 내어준다.” 이 약속이 화폐의 본질이다. 화폐는 추상적인 약속이다. 우리는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신용credit’이라고 부른다. 그 약속이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지켜진다는 사실을 외국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달러화, 엔화, 유로화, 위안화를 기꺼이 한국 돈으로 바꾼다.

그러나 한국 돈으로 외국에서 두바이유와 캐나다산 밀가루를 살 수는 없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증이 국경 밖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통하는 신용은 미국 정부의 약속인 달러뿐이다.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

한국 돈으로 한국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가 형편없다면 외국인들은 한국 돈을 하찮게 여길 것이다. 실제로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한국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가발과 조악한 라디오뿐이야.’ 대부분의 외국인이 그렇게 생각할 때 원화의 가치는 종이 쪼가리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위안화가 외환시장에서 점점 더 나은 대접을 받는 이유는 중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경제규모가 워낙 크기도 하지만 위안화로 구입할 수 있는 중국 상품이 매우 다양하고 품질도 꽤 좋아졌다. 사람들은 위안화를 갖고 중국산 가전제품·전기자동차·선박·휴대전화·드론·컴퓨터 등을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위안화의 신용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

2017년 한국의 명목 GDP(국내총생산)는 1조 5,297억 달러다. 원화로 환산하면 약 1,600조 원이다. 만약 누가 1억 원의 소득을 올렸다면 그 사람은 2017년의 총생산물에 대해 ‘1,600조 분의 1억’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외국인일지라도 한국 돈 1억 원을 갖고 있으면 한국 시장에서 같은 권리를 갖는다.

일본 시장에서 100만 엔과 교환할 수 있는 재화의 양과 질이 중국시장에서 5만 8,000위안(약 100만 엔)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재화의 양과 질보다 월등하다면 당신은 어느 돈을 갖겠는가? 엔화와 위안화의 교환비율은 외환시장에서 분·초 단위로 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만약 시장의 조정 기능에 이상이 생겨서 이런 격차가 발생했다면 엔화는 실제 가치보다 저평가되었고 위안화는 실제 가치보다 고평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럴 때 이재에 밝은 사람들은 위안화를 팔고 엔화를 산다. 여기서 통화의 가치는 결국 그 나라의 생산능력과 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화폐는 그 화폐에 대한 대접이 좋은 곳으로 흘러간다. 대접이 좋다는 것은 그 화폐를 지불할 때 더 나은 재화나 서비스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또한 그 화폐를 빌려주었을 때 더 높은 이자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이 원리는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다. 중국 여행자가 가진 위안화에 대해서 한국 시장이 일본 시장보다 나은 대우를 해주면 중국인들은 당연히 한국으로 몰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시장에 투자할 때 일본 시장에서보다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다면 외국자본은 한국으로 쏠릴 것이다. 베트남이 더 나은 대우를 하면 베트남으로 가고, 필리핀이 더 나은 대우를 하면 필리핀으로 간다.

신용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화의 신용은 한국의 국내총생산에서 나오고, 위안화의 신용은 중국의 국내총생산에서 나온다. 달러는 조금 다르다. 달러라는 특별한 화폐에는 미국 국내총생산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달러를 갖고 있으면 전 세계 어디에서 어떤 상품이든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달러는 사실상 세계총생산을 담보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기축통화만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특권이다(달러에 대해서는 제4장에서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돈은 신용일 뿐’이라는 사실을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돈이 귀금속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화폐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화폐 대신에 무엇인가를 내줄 때 의미가 있다. 화폐 공급량의 증가는 화폐 발행을 독점하는 정부를 부유하게 해줄지는 몰라도, 사회의 부를 늘리지는 못한다. 다른 조건이 똑같다면 통화팽창(인플레이션)은 물가만 높일 뿐이다. <계속>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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