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유일한 손녀 유일링 이사 반대에도 '회장·부회장직' 신설
"더 큰 회사 도약 발판 마련" vs "특정인 사유화 시도" 갈등 증폭

주주총회 입장하는 유한양행 창업자 손녀인 유일링 유한학원 이사. 연합뉴스
주주총회 입장하는 유한양행 창업자 손녀인 유일링 유한학원 이사. 연합뉴스

 

유한양행이 28년 만에 '회장직제'를 부활시켰다. 1926년 회사를 창업한 고(故) 유일한 박사의 신념과 다른 길이기에 논란이 컸으나 예상보다 순조롭게 통과된 모습이다. 다만 여전히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등 '100년 기업'의 행보가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유한양행은 지난 15일 서울 동작구 유한양행 빌딩에서 제101기 정기 주주총회을 열고 회장·부회장직을 신설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된 제2호 의안인 '정관 일부 변경의 건' 등 주요 안건들을 통과시켰다.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이사(사장)은 이날 주주들에게 "회사 성장에 따라 언젠가 필요한 직제이므로 이번에 정관을 고치게 됐다"며 신설 배경을 설명했다.

조 사장은 특히 "회장과 부회장 신설은 다른 사심이나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에 제 명예를 걸고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회장과 부회장을 두더라도 임원의 일부로 직위만 다는 것이지, 특권을 주거나 이런 것은 없기 때문에 주주들이 이 점은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이 시점에서 (내부 임원에게) 회장을 하라고 해도 누구도 할 사람은 없고, 설사 본인이 한다 하더라도 이사회에서 반대할 것"이라며 "언젠가는 미래를 위해서 이 직제가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한양행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다'는 창업주 고 유일한 박사의 신념 아래 지난 28년간 전문경영인의 최고경영자(CEO) 3년 중임제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에 유한양행의 100년 역사 중 회장을 지낸 인물은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와 연만희 전 고문이 유일했다.

유일한 박사는 생전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와 종업원의 것'임을 강조했다. 1936년 회사를 종업원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본인의 직계가족들은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재단 이사회에만 참여하도록 '유한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유한재단은 유한양행의 최대주주(지난해 말 지분율 15.8%)로, 유한양행 경영진을 견제하는 균형 장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유한양행의 회장직제 부활 시도가 알려지면서 주총 전부터 유한양행을 둘러싸고 내홍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부 임직원들은 지난 11일부터 주총이 열린 15일까지 본사 앞 트럭 시위를 벌이며 회장직제 부활에 반대하는 등 강하게 의견을 표출했다.

이들 중에서는 '특정인이 기업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라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며 기업 사유화 반대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특정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지난 6년간 유한양행 대표이사(사장)을 지낸 이정희 유한재단 이사회 의장이 대표적이다.

유일한 박사의 손녀인 유일링 유한학원 이사도 주총을 앞두고 "유한양행이 할아버지의 창립 원칙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우려된다"고 밝히며 회장직제 부활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번 주총에도 이례적으로 참석해 "회장직이 만들어지면 의사결정 구조가 늘어나고 권력이 집중돼 유한양행의 창립 정신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15일 유한양행의 회장·부회장직 신설 등 정관 변경 안건 의결과 관련한 정기 주주총회가 열린 서울 동작구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신설안 철회 촉구 트럭 시위가 열렸다. 연합뉴스
15일 유한양행의 회장·부회장직 신설 등 정관 변경 안건 의결과 관련한 정기 주주총회가 열린 서울 동작구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신설안 철회 촉구 트럭 시위가 열렸다. 연합뉴스

 

다만 이같은 임직원들과 창업주 손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당 안건은 이번 주총에서 출석주(전체 주식 중 68.6%) 가운데 상당히 높은 95%가 찬성하며 원안이 가결됐다. 주총 후에는 손녀 유일링 이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주총장을 떠나는 모습이 비춰졌다.

예상보다 순조롭고 빠르게 회장직제가 부활된 가운데 유한양행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커지고 있다. 먼저 유한양행이 그간 기업의 사유화를 방지하고자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유한재단을 통해 유한양행 경영진을 견제하도록 해왔는데 이번 회장직제 부활로 '청렴 기업' 이미지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같은 장치가 무너지기 시작한 때로 이정희 의장이 유한재단 이사로 선임된 시기가 꼽히기도 한다. 2022년 이 의장이 유한재단 이사로 들어오고 손녀 유일링 이사가 유한재단 이사로 재선임되지 않기도 했다. 현재 유한재단은 이사회 이사 10명 중 6명이 유한양행 전·현직 임직원으로 구성된 상태다. 이 의장이 특정인으로 지목되는 이유다.

다만 이 의장은 "회장이 생긴다고 해도 그 자리에 오를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공식, 비공식적으로 수없이 이야기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회장을 할 일은 추호도 없다"며 "회장직 신설은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계상해 회사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며 의혹에 대해 정면 반박했다.

이번 주총에서 일부 주주들은 회장·부회장직 신설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주목받기도 했다. 이에 조 사장은 "R&D(연구개발) 분야는 특히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 유한양행이 신약개발에 더욱 투자하기 위해서는 특히 필요한 부분이다"며 " (회장·부회장직 신설은) 유한양행이 더욱 큰 회사로 발전하기 위한 발판인 것"이라고 답했다.

이 과정에서 창업주 손녀 유일링 이사에 대한 의견이 듣고 싶다는 주주의 요구에 유 이사는 "유일한 박사님의 유지와 이상, 정신이 유한양행 지배경영의 가이드라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모든 것은 '얼마나 정직한 방법인가' '얼마나 경영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등에 따라 평가돼야 한다"고 발언했다.

유한양행 측은 이번 정관 개정의 목적을 ▲회사의 양적·질적 성장에 따른 직제 유연화 ▲외부인재 영입을 대비한 직급 범위 확대 ▲정관상 '대표이사 사장'으로 표기된 직함을 표준정관에 따라 '대표이사'로 변경하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조 사장은 "유한양행에는 6개 본부가 있고 6명의 부사장이 있는데 다른 회사처럼 언젠가 큰 회사로 가야 한다면 그에 맞춰 회장·부회장직제를 신설해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글로벌 제약사 도약을 위해서 회장 등 고위직 신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유한양행은 지난해 매출 1조8590억원을 기록했으며 올해 국내 전통 제약사로는 첫 매출 2조원 돌파가 기대되고 있다. 다만 글로벌 분야에서는 다소 아쉽다는 평가가 뒤따르는데, 지난해 수출은 2412억원으로 전체 매출의 13% 정도였다.

회장직제 신설 안건이 통과되자 회장 선임 절차에 대한 의견도 나왔다. 선임 절차는 객관적인 절차가 필요한 만큼 외부인으로 구성된 '선임추천위원회(가칭)'를 구성해달라는 제안 등이다. 이에 조 사장은 "향후 절차를 진행하게 되면 그런 부분도 고려하겠다"고 답했다.

[스트레이트뉴스 함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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