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택배기사 잇단 사망사고에 '과로 방지 대책' 긴급발표
택배사·대리점 갑질도 근절..내년 상반기 표준계약서 마련
알아서 작업시간 줄여라?..민감한 문제 회피한다는 비판도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과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12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과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12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 올해 들어 과로사로 추정되는 택배기사 사망사고가 잇달아 발생하자 정부가 서둘러 대책을 마련에 나섰다.

정부는 업무량이 급증한 택배기사의 과로를 막기 위해 하루 작업시간 한도를 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택배기사도 주 5일 근무를 할 수 있게 해 충분한 휴식 시간을 갖도록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러한 내용을 포함한 '택배기사 과로 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을 보면 정부는 우선 택배사별로 상황에 맞게 1일 최대 작업시간을 정하고 그 한도에서 작업을 유도한다. 이를 위해 택배기사 작업 조건에 대한 실태조사와 직무 분석 등을 거쳐 적정 작업시간의 기준을 마련한다. 택배사별로 자동화 설비 등 여건에 따라 적정 작업시간도 차이가 날 수 있다.

택배기사는 대부분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택배사나 대리점과 위탁계약을 맺고 일하는 특수고용직(특고) 종사자다. 특고는 근로시간을 제한하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아 장시간 근무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문제점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정부는 주간 택배기사에 대해서는 오후 10시 이후 심야 배송을 제한하도록 권고할 방침이다. 오후 10시를 배송 마감 시각으로 정하고 심야 배송이 계속되면 작업체계를 조정해 적정 작업시간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나아가 오후 10시부터는 업무용 앱을 차단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정부는 아울러 택배사별로 배송량 등을 고려해 노사 협의를 거쳐 택배기사의 토요일 휴무제를 도입하는 등 주 5일 근무제 확산을 유도한다.

택배기사의 과중한 업무 부담 원인으로 지목되는 택배 분류작업은 노사 의견수렴을 통해 명확화·세분화하는 방식으로 업무 부담을 줄일 계획이다. 택배기사들은 분류작업이 본연의 업무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택배사는 배송 업무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어 의견이 맞서고 있는 실정이다. 

택배기사에 대한 택배사와 대리점의 갑질 등 불공정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도 적극 추진된다. 정부는 택배기사 수수료 저하를 야기하는 홈쇼핑 등 대형 화주의 불공정 관행을 조사하고 필요한 부분은 개선한다는 방침이다.

작년 기준으로 택배기사의 배송 수수료는 1건당 800원 수준에 불과하다. 배송 수수료가 하락할수록 택배기사는 소득 유지를 위해 배송을 많이 해야 하는 구조다.

정부는 배송 수수료를 떨어뜨리는 대형 화주의 이른바 '백마진' 관행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 개선책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다. 백마진은 택배사가 대형 화주에게 지급하는 일종의 리베이트로, 배송 1건당 600원 수준이다. 대리점이 택배기사에게 부과하는 위약금 등이 불공정 거래에 해당할 경우 금지하는 방안도 검토할 방침이다.

더불어 내년 상반기 중으로 택배기사의 적정 작업시간, 심야 배송 제한, 분류작업 기준, 갑질 금지 등을 포함한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택배 사업자 인정 요건으로 활용하는 등 보급을 확대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서울·경기본부, 전국택배연대노조, 진보당 등 노동단체와 진보 정당 등이 모인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지난달 24일 CJ대한통운·한진택배 등 택배노동자 과로사 관련 장시간 노동 환경 개선 촉구 집회를 열었다. 

 

택배기사의 산재보험 가입을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현행 법규상 택배기사는 산재보험 적용 대상인 14개 특고 직종에 속하지만, 본인이 신청하면 적용에서 제외되고 있다. 보험료 부담을 기피하는 대리점주 등의 압력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부 대리점에서는 신청서 대필 의혹도 제기된 바 있다.

노동부는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을 한 택배기사 약 1만6000명에 대한 전수 조사를 거쳐 위·변조 등 법 위반이 적발되면 적용 제외 취소 등 조치를 할 계획이다. 또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서는 본인이 직접 제출하도록 하고 적용 제외 강요 행위 등에 대한 처벌 조항을 신설하는 등 관련 제도를 개선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이 외에 대리점에 택배기사 건강진단 실시 의무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택배기사의 뇌·심혈관 질환 등 위험이 있으면 작업시간 조정 등을 하도록 제도를 개선할 방침이다. 택배기사의 직무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가이드라인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시민사회는 이번 정부의 대책 마련을 일단 환영하면서도 산재보험 제외 등 실질적인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며 유감을 표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비상대책위원회는 이번 대책 마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밤 10시까지'를 적정 작업시간이라고 언급한 것은 매우 부적절한 처사"라고 꼬집었다. 택배노동자들이 밤 10시까지만 일해도 하루 15시간을 근무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리점 측의 대필 의혹을 낳은 '산재보험 적용제외신청'과 관련해서는 "신청 제도를 폐지하지 않고 일부 제외 사유를 허용했는데 사측에 악용 여지를 남겨둔 것"이라며 "택배노동자 산재보험 적용율이 낮은 근본 이유인 산재보험료 부담 문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것은 유감"이라는 입장이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대책에서 핵심 영역이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분류와 배송의 이원화를 위한 법률적 강제조항, 가장 시급한 분류작업의 추가 인력투입 등이 누락된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를 강제할 법과 제도의 미비로 인해 택배회사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식이 될 수 있다. 향후 사회적 대화 기구를 출범하며 이 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스트레이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