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2018)」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보이지 않는 경제학

 

오늘날 글로벌 경제가 어떤 문제에 봉착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인류는 ‘문제 안에 해법이 있다’는 오래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상황은 문제를 알아도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일단 수면 위로 드러난 문제는 소비와 투자다. 사람들은 소비를 늘리지 않고 기업은 투자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소비가 늘면 기업은 늘어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설비를 늘린다. 그게 투자다. 투자가 늘면 공장(제조업)이나 가게(서비스업)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해진다. 따라서 일자리가 늘어난다. 기업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그만큼 노동자의 소득은 늘어난다. 노동자는 일해서 번 돈을 먹고사는 데 쓰고, 남는 돈은 저축한다. 저축은 미래의 소비이므로 언젠가는 소비의 밑천이 된다.

결국 노동소득은 대부분 소비로 이어진다. 소비는 다시 투자를 유발하고 투자해서 번 돈은 기업소득과 노동소득으로 분배된다. 이게 경제의 선순환구조다. 이렇게만 되면 죽어가던 경제도 팔팔하게 살아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별로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데 이게 왜 안 될까?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졌다는 것은 이 순환구조가 어디선가 망가졌다는 뜻이다. 옥스팜 보고서를 이해했다면 고장난 곳을 금방 찾을 수 있다. 경제의 선순환구조는 ‘분배’에서 망가졌다. 상위 1퍼센트가 나머지 99퍼센트보다 많이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소비의 주축인 중산층의 구매력이 크게 떨어졌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오늘날 아프리카, 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지역에는 식량에 대한 강력한 수요가 있다. 그러나 민간 구호단체나 자선단체에 의해 유지되는 실낱같은 공급이 있을 뿐이다. 자본은 오직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 수요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구매력이 뒷받침된 수요를 경제학에서는 ‘유효수요有效需要, effective demand’라고 한다. 이 개념을 처음 생각한 사람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아프리카 어린이의 배고픔과 갈증은 주류 경제학의 시각으로 보면 수요가 아니다. 분석할 필요도 없는 허수다. ‘사람의 일상을 다루는 학문이 경제학’이라고 말하면서 굶주리는 8억의 삶은 다루지 않는다. 가난한 자의 필요와 욕구는 유효수요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소득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2017년 대선 토론에서 유승민 후보의 집요한 질문에 문재인 후보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소득주도성장 다 좋은데, 소비를 촉진할 그 소득은 어디서 나옵니까?” 약간의 경제 지식만 있어도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였다.

세상에는 ‘쓸데 없는 돈’이 굉장히 많이 있다. 상위 1퍼센트가 가진 돈의 99퍼센트는 ‘쓸데’를 찾지 못하고 은행에서 이자나 불리고 있다. 한편 세상의 다른 쪽에는 ‘쓸 돈이 없는 수요’가 어마어마하게 존재한다. 장사꾼들은 유효수효가 아니라며 이 수요를 무시한다.

‘쓸데 없는 돈’을 ‘쓸 돈이 없는 수요’로 옮기는 순간, 폭발적인 유효수요가 창출된다. 마치 건조한 봄날에 마른 숲이 타는 것 같을 것이다. 그 열기가 중산층으로 옮겨붙으면 인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해법은 너무 간단해서 다툼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나 막상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행하려고 들면 엄청난 반대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상위 1퍼센트는 부만 장악한 것이 아니라 행정, 사법, 입법, 언론을 틀어쥐고 있다.

 

양적완화 정책은 왜 실패했나? 양적완화는 이미 가난해진 국민에게 빚내서 소비하라고 부추긴 정책이다. 거지가 되었거나 거지가 되기 직전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여러분, 은행에 돈을 잔뜩 갖다 놓았으니 마음껏 빌려 쓰시기 바랍니다. 이자는 거의 안 받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은행으로 달려갈까?

소득이 늘어날 가망이 없는 사람이 빚내서 흥청망청 쓸 수 있을까? 그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비난하는 ‘도덕적 해이’가 아닌가. 

양적완화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던 통화정책이다. 많은 사람이 실패를 예고했고, 실제로 실패했다. 망가진 선순환구조를 고치려고 정부와 중앙은행에 수리를 맡겼더니, 고장 난 부품은 건들지도 않고 엉뚱한 자리에 기름칠을 한 꼴이다.

이런 사정을 미국, 일본, 유럽의 정책결정자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잘 알면서도 이런 무의미한 정책을 수년간 실행한 이유는 간단하다.

누구나 아는 명쾌한 해법, 즉 ‘쓸데 없는 돈’을 ‘쓸 돈이 없는 수요’로 옮기는 정책을 시장권력을 틀어쥔 자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정책결정자와 시장권력자가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시장권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행정, 사법, 입법, 언론을 길들이고 포섭하고 장악했다.

상위 1퍼센트를 위한 경제를 나머지 99퍼센트를 위한 경제로 전환할 수만 있다면, 유효수요는 쉽고 빠르게 창출된다. 유효수요가 커지면 내수시장이 활발해지고, 내수시장이 살아나면 중소기업이 튼튼해진다. 중소기업이 살면 자영업이 살고, 자영업이 살면 중산층이 복원된다. 경험에서 배운 인류의 문제해결방식은 틀리지 않았다. 역시 문제 안에 해답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해답을 실천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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