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설레발리제이션

「노사정위가 합의했다는 소식에 그런 가보다, 했다」
「확정되지 않은 사안에 죽자고 달려드는 건 파리대왕의 후예」
「누가 한글을 이토록 저질로 만들고 있는지 몰라서 물어?」
「국민들은 합리적인 언론을 기다려」

 

그런 가보다, 했다

어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가 13일에 끌어낸 잠정 합의안을 ‘2000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약탈’로 규정, 오늘(15일)부터 전국 각 사업장 간부들이 선도파업에 나서는 규탄투쟁을 실시해 ‘총파업 투쟁’과 ‘범국민 총궐기’로 이어갈 거라고 했다. 그저 그런 가보다, 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한국노총 중앙집행위원회가 합의안을 통과시키자,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은 ‘청년 일자리’, ‘국민의 열망’, ‘대승적 결단’, ‘환영’과 같은 틀에 박힌 말뿐 아니라 근엄을 가장한 표정까지 동원해가며 “노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양보와 타협을 통해 나라를 살리는 데 앞길을 연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늘 하는 자화자찬... 뭐, 그런 가보다, 했다.

 

얘들아, 전쟁놀이 했니? 자, 이제 집에 가자

그런 가보다, 했던 이유는 ‘시니컬cynical’과 ‘발끈’이라는 두 가지 느낌 때문이다. 우선 시니컬한 측면에서는, 인간의 야만성을 통찰한 작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이 떠올라서다.

파리대왕의 결말은 놀라움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무인도에 추락한 여객기에서 소년들만 살아남는다. 소년들은 점차 문명에 어울리지 않는 악을 드러내다가 두 파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는 야만인이 되어간다. 그 끝에 주인공 꼬마가 필사적으로 도망치지만, 해변으로 내몰리고 만다. 주인공 꼬마가 삶에 대한 희망을 접는 순간, 구조대가 나타난다. 해군장교가 다가오더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주인공 꼬마와 그 꼬마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려 했던 야만인 꼬마들에게 말한다.

“얘들아, 전쟁놀이 했니? 자, 이제 집에 가자.”

서울신문, 세계일보 등 언제나 중간 어디쯤에서 목을 반쯤 빼고 기웃거리는 언론사들을 제외하고 보면, 이번 잠정 합의안을 대하는 주요 언론들의 태도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꼬마들을 볼 수 있다.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경향의 9월 14일자 머리기사와 사설들을 ‘섞어서’ 살펴보자.

󰌛 조선일보 「노사정, ‘임금피크 도입해 청년고용 확대’」
󰌛 중앙일보 「극적 타결한 노동개혁안 ... 신속한 법제화 나서야」
󰌛 동아일보 「노사정, 17년 만에 노동개혁 잠정 합의」

󰌛 한겨레 「‘쉬운 해고’ 정부안 사실상 수용... ‘들러리 한국노총’ 비판 일듯」
󰌛 경향신문 「노사정 ‘대타협’, 헌법 무시해도 좋다는 면죄부 아니다」

청와대와 한국노총뿐 아니라 기획재정부 국정감사에서 “해고를 쉽게 한다는 게 아니라 공정한 해고를 한다는 것”이라고 했던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포함한 정부‧여당은 이번 잠정 합의안을 마치 확정안이라도 되는 양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과 민주노총 등은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조선일보는 이번 노사정 대타협으로 청년 일자리 문제가 일정 부분 해소될 거라고 했고, 중앙일보도 청년 고용이 상당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제2의 경제도약을 이끌 합의라고까지 추켜세웠다. 반면 한겨레는 한국노총을 ‘정부발 노동시장 구조개편의 들러리’라고 몰아세웠으며, 경향신문 역시 “한국노총은 노동법의 기본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려는 정부‧여당의 반민주적 폭거에 조연 노릇을 했다”고 성토했다.

양쪽을 싸잡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애들은 싸우면서, 얻어맞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크는 거니까 말이다.

그런데 노사정위가 노동시장 개혁에 합의한 내용을 보면 통상임금의 범위, 근로시간 단축, 실업급여 강화, 출퇴근 재해 산재 적용 등에 대해서는 이미 합의가 이뤄졌고, 세 가지 핵심 쟁점인 일반해고와 비정규직 근로자의 사용기간 연장, 파견 근로자 확대 등에 대해서는 문자 그대로 ‘협의를 하자’는 데 합의한 것일 뿐이다. 추후로 미뤄놓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게 팩트fact다. 확정된 사안도 아니고, 더군다나 이제부터 펼쳐질 길고 험난한 여정을 앞둔 출발점에서 ‘협의해 나가기로 한 합의’를 들고 파리대왕의 꼬마들처럼 죽창으로 서로를 찔러 죽이려고 하는 건, 명분을 선취하기 위해 약한 꼬마부터 죽였던 무인도의 야만인 꼬마들과 무엇이 다른가?
지금 이 순간, 그들 모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 하나뿐이다.

“얘들아, 전쟁놀이 했니? 자, 이제 집에 가자.”

 

누가 그랬는지 정말 몰라!?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두 번째 이유는 ‘발끈’한 느낌이고, ‘발끈’의 대상은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주필이 쓴 ‘합의하기로 합의했다는 합의문(9월 14일)’이라는 제하의 칼럼이다.

제목에서부터 절친인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를 향해 “협의와 합의도 모르느냐”고 힐난했던 홍준표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말이 떠오른다. 정규재 주필이 협의와 합의의 차이를 몰랐을까? 설마... ‘합의’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들어가면 제목으로 ‘딱’이네, 하는 옐로우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의 발동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아무튼 그는 칼럼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언급하면서 ‘언어는 언제나 정치 현실을 반영한다’고 했다. 얼마 전 목함지뢰 사건 후에 남북이 합의했던 ‘병사들이 다쳐서 유감’이라는 문장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사고가 아닌 도발, 유감이 아닌 사과’라고 우겼다고도 했다. 우리 정치권에서는 언어의 혼란이 마치 1984년에 옮겨 와 사는 것처럼 계속되고 있으며, 누가 한국어를 이토록 저질 언어로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는 또 이번 잠정 합의안, 즉 ‘합의하기로 합의한 합의문’을 놓고 김대환 노사정 위원장이나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면서, ‘누가 언어를 교란시켰는지 알 수 없다’고 개탄했다. 여기까지는 언론의 본분을 잊지 않은 참으로 바른 칼럼이지 싶다. 언론의 정도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균형을 가장한 그의 쏠린 글을 더 읽어보자.

‘가장 확실한 것은 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개혁은 그렇게 확실하게 봉쇄됐다.’
‘노조와의 합의를 모든 노동개혁의 조건으로 선언한 것을 정부는 지금 노‧사‧정 합의라고 부르고 있다.’
‘해고라는 말도 사라졌다. ...... 그것도 노사와 충분한 협의라는 조건부였다.’
‘임금체계 개편도 장차 요건과 절차를 명확하게 정하기로 했을 뿐이다. 물론 이 조항 역시 노사 간 충분한 협의를 거쳐야 하는 조건부였다.’
‘노조는 이번에도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노조법은 아예 신성불가침이었다.’

이게 주요 일간지에 날 만한 칼럼인가? 일간지 주필 정도면 양쪽의 주장이 모두 틀렸다는 양비론마저도 경계해가면서 정론직필을 휘둘러야 마땅하거늘, 이처럼 사안이 확정되기도 전에 대놓고 정부 편에 서서 ‘설레발리제이션’을 쳐대는 꼴이라니! 한국경제는 기업주들만 움직여서 만들어지는 경제라서 그런가?

다 좋다. 조선과 중앙, 동아도 편을 정했고, 한겨레와 경향도 편을 정한 마당이니, 다 좋다고 치자. 그런데 정말로 화가 나는 것은, ‘누가 한국어를 이토록 저질 언어로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물음이다.

정치권 꼬마들이 벌이는 전쟁놀이를 이리저리 굴려가면서 한자도 아닌 한글을 동음이의어로 만든 이들이 누군지 몰라서 묻는 것인가? 수십 년 정치 역정을 겪어오는 과정에, 자기 밥줄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잘못된 역사를 어떻게든 미화시켜보려고 글을 돌려 쳐가면서 희끄무레한 공간 어디쯤에서 언론 생색내기에만 몰두해 온 장본인들이 누군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가 말이다!

꼬마들의 전쟁터에서 정말로 사라져야 할 색깔은 ‘빨강’이나 ‘파랑’이 아니라 ‘발가스름’이나 ‘퍼러무리’다. 그런 것처럼 사라져야 할 언론 역시 친 기업 언론이나 친 노동자 언론이 아니라, 상황 따라 수시로 변하는 부화뇌동 펜, 조변석개 앵글이다.

오늘 15일은 대타협 공식 서명이 완료된 날이다. 그리고 내일은 여당이 의원총회를 열어서 노동개혁법안 발의를 논의하는 날이다. 우리나라 말, 한글이 언론의 ‘밥그릇 준동’에 의해 다시 한 번 저질이 되어야 할 날들이다.

 

합리적인 언론을 기다리며

‘국경없는기자회’가 매년 발간하는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언론자유는 세계 31위였던 2006년의 7.75점(최고점은 0.5점, 낮을수록 언론자유 높음)을 정점으로 24.48점(2013, 세계 50위), 25.66점(2014, 세계 57위), 26.55(2015, 세계 60위)로 곤두박질쳐 왔다. 특히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세계적 경제위기recession의 여파와 미네르바 사태로 몸살을 앓았던 2009년에는 충격적인 69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현재 우리 언론의 자유도는 파푸아뉴기니, 아이티, 말라위보다 낮다.

▲ 우리나라 언론 자유도의 추이 (Reporters without Borders. WPF Index 2015)

더군다나 국제 언론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freedomhouse가 ‘언론 자유국’이었던 한국을 ‘부분적 언론 자유국’으로 끌어내린 지는 이미 오래다. ‘부분’이라는 용어에 혹해서는 현실을 볼 수 없다. 부분적 언론 자유국이란, 비판을 일부 허용하되, 국민들이 실제보다 더 민주적인 국가라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까지만 허용하는 국가를 말한다.

미디어는 이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잊은 지 오래인 의사 집단처럼 되어버렸다. 지금의 미디어에 정론직필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언젠가부터 미디어가 오로지 나만 위하는 ‘me, dear’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정신없는 펜’을 놀리며 사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얘들아, 전쟁놀이 했니? 자, 이제 집에 가자.”

사명감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싶은 분들, 내가 언론의 권력을 향유하고 있구나, 싶은 분들, 국민을 미혹하는 교묘한 글 터치로 편향성을 감추는 잔재주를 능력으로 오판하는 분들, 이제 제발 그만 집으로 돌아가시라.

국민은 기다리고 있다. 보수적이되 때때로 정부를 준엄하게 꾸짖을 줄 알고, 진보적이되 때때로 정부를 칭찬할 줄도 아는 합리적인 관점을 지닌 언론, 대놓고 주구장창 한쪽 편만 드는 바람에 오히려 반대편에 대한 지지가 더욱 공고해지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언론, 다시 말해서 합리적인 진보 언론 및 합리적인 보수 언론을 말이다.

 

김태현 두마음행복연구소 소장, 인문작가, 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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