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은행가 등장

지금은 돈에 이자가 붙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오랫동안 금기시했다. 중세의 교회가 고리대금업을 끔찍이 증오했던 이유는 신의 소유인 시간을 훔치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는 그의 대표작인 『신곡Divina Commedia』에서 지옥에 떨어진 고리대금업자들이 “뜨거운 흙바닥과 타오르는 모래 더미에서 고통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손을 흔든다”라고 묘사했다. 325년 로마교회는 성직자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금지했고, 1179년에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자는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대인에게도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일은 금기였다. 그러나 『구약성서』 「신명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너희는 형제에게 이식interest을 취하지 말지니, 돈이든 음식이든 무릇 이식이 붙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방인foreigner에게 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유대인이다(베네치아를 영어로 베니스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이 고리대금업자를 증오했지만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여 샤일록의 재산을 몰수하고 채무자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1파운드의 살점이 걸린 재산권 분쟁을 매듭지었다.

1590년경, 베네치아에 사는 유대인은 약 2,500명이었다. 베네치아 정부가 유대인의 거주를 허용한 것은 종교적 관용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 필요 때문이었다. 유대인은 세수稅收의 원천인 동시에 자본의 공급자였다. 유대인 사채업자들은 유대인 특별거주지에서 골목에 긴 탁자를 놓고 영업을 했다. 이 탁자를 방코banko, 그 일을 하는 유대인을 방카banka라고 불렀는데, 영어 단어 중 은행을 뜻하는 뱅크bank와 긴 의자를 뜻하는 벤치bench는 모두 여기에서 비롯했다.

당시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와 피렌체에는 스페인, 프랑스, 오스만제국 등 여러 나라의 주화가 흘러들었고, 유대인 금융업자들은 재질과 무게가 서로 다른 화폐들을 저울에 달아서 교환해 주는 일을 했다. 그러니까 초기의 은행가는 환전상이었다. 파운드, 마르크, 페소, 리라, 달란트, 세겔 등의 화폐단위가 모두 무게의 단위임을 떠올리면 왜 환전상에게 저울이 필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거래가 많은 상인들은 환전상에게 돈(금 또는 은)을 맡겨놓고 필요할 때 찾아 쓰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래 상대가 같은 환전상을 이용할 경우 더욱 편리했다. 환전상은 상인의 돈을 맡을 때 보관증을 써주었다. 오늘날의 예금 업무다. 샤일록에게 그러했듯 유대인에게 사채업은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자신이 가진 돈만 빌려주었다.

교역이 활발해지고 대출을 원하는 상인이 계속 늘어나자 환전상들은 차츰 고객이 맡긴 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물론 주인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고객들이 맡긴 돈을 한꺼번에 찾아가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적당한 양의 돈만 보관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늘날의 지급준비금reserve 개념이 그때 이미 싹트고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유대인들이 돈놀이를 할 때, 피렌체에서는 메디치Medici 가문이 금융업을 장악했다. 초기의 메디치 가문은 은행가라기보다 조직폭력단에 가까웠다. 1343년부터 1360년 사이에 메디치 가에서 5명이 중죄를 짓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de' Medici가 은행가로 확고한 입지를 굳힌 후 메디치 가는 교황 3명, 프랑스 왕비 2명, 공작 3명을 배출했다.18 그리고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갈릴레오 갈릴레이, 보티첼리 등 많은 예술가와 과학자를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의 문을 활짝 열었다.

돈(금)의 유통이 전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면서 유럽 각지에 은행이 생기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말까지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고, 세계 최대의 무역국이었으며, 세계 최고의 금융 선진국이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에서 독립을 쟁취할 무렵, 서유럽의 상선 가운데 반 이상은 네덜란드 배였다. 네덜란드의 번영에는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자본과 노하우가 큰 역할을 했다.

1602년 암스테르담에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가 탄생했고, 1609년에는 다양한 외환거래를 표준화하기 위해 최초의 중앙은행인 암스테르담은행이 설립되었다. 암스테르담은행은 상인들에게 표준화폐인 길더Guilder로 계좌를 개설해 주었는데, 수표와 이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계좌 간 이체는 오늘날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금융혁명이었다.

현대의 디지털화폐처럼 순간이동의 마법을 부리지는 못했지만 화폐가 추상적 숫자의 형태로 장부에서 장부로 이동하는 시스템을 창안한 것이다. 1610년에는 증권거래소가 만들어졌고, 종신형 연금, 상속형 연금, 복권식 채권, 해상보험, 선물, 옵션 등 각종 금융상품이 판매되었다. 네덜란드에는 1650년에 이미 6만 5,000명의 금리생활자가 있었다. 

1688년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고 제임스 2세가 쫓겨나자 네덜란드의 통치자였던 윌리엄 3세William III, 1650~1702가 영국의 군주로 등극했다. 그가 영국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가 영국
왕 찰스 1세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아내는 외삼촌인 제임스 2세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장인은 외삼촌이고, 아내는 외사촌 동생이다. 이런 인연으로 본의 아니게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왕이 된 윌리엄 3세는 원래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유럽 왕실의혈연관계는 정말 복잡하다. 그런데 역사를 바꾼 주역은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승인한 윌리엄 3세가 아니라 그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한 약 3만 명의 네덜란드인이었다. 그들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의 무역·금융·조선 기술이 영국에 전해졌다.

물론 자본도 사람을 따라왔다. 1694년 영란은행(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고, 런던은 국제금융의 중심지로 도약했다. 1759년 영란은행은 액면가가 10파운드로 통일된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지폐는 고객이 원할 때마다 즉석에서 발행되었다.

예를 들어 무역상 스미스 씨가 영란은행에 찾아가 “지폐 100파운드를 발행해 주시오” 하고 요청하면 은행 직원은 10파운드짜리 지폐 열 장을 꺼낸다. 지폐 위에다 자신(발행인)이 먼저 서명을 하고 스미스 씨(수취인)의 서명을 받은 다음 지폐를 내어준다.

물론 은행의 금고 안에는 스미스 씨의 금괴가 예치되어 있다. 1853년이 되어서야 발행인과 수취인의 서명이 없는 지폐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계속>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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