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교환하고 계산하고 저장한다

화폐가 인간 사회에 출현하자마자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다른 재화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강력한 기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기능은 마약과도 같아서, 한 번 익숙해지면 벗어나기가 무척 어렵다. 화폐의 기능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화폐는 교환의 매개수단medium of exchange이다. 화폐가 없다면 필요한 모든 물건을 직접 생산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을 찾아다니며 내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 가지고 있다면 내가 가진 물건과 바꿀 의향이 있는지 일일이 물어보아야 한다. 요행히 그런 사람을 만난다 해도, 물건의 크기와 가치가 서로 맞지 않으면 매우 난감할 것이다. 솜을 생산한 사람이 황소 한 마리를 구하려면 솜을 얼마나 가지고 가야 할까? 수레 두 대에 바리바리 솜을 싣고 간다고 치자. 만약 황소 주인이 “나는 솜바지 한 벌을 만들 정도면 충분한데”라고 말하면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화폐는 가치를 계산하는 단위unit of account다. 화폐가 없다면 모든 상품의 가격을 다양하게 표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양 한 마리의 가격은 닭 열 마리, 소 등심 네 근, 쌀 두 말, 콩 다섯 되, 조 한 가마니,면포 한 필, 송곳 30자루 등 교환 가능한 모든 상품의 수량으로 환산할 필요가 있다. 만일 시장에서 거래되는 품목이 100종이라면 한 상품을 99가지 상대가격으로 표시해야 한다. 결국 100종의 상품을 모두 취급하는 백화점 점원은 4,950가지의 서로 다른 교환비율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외환시장에서는 이런 불편한 상황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셋째, 화폐는 가치의 저장수단store of value이다. 한 해 동안 먹을 양식을 비축해 놓지 않아도 은행 잔고에 그만한 가치의 돈이 있으면, 언제든 마트에 가서 쌀과 고기와 라면으로 바꿀 수 있다. 화폐가 없으면 언제 쓸지도 모를 물건들을 쌓아놓기 위해 집집마다 큰 창고를 지어야 한다. 또한 퇴직금이나 연금 같은 형태로 과거의 노동소득을 비축하는 수단이 없다면 은퇴 후의 삶이 무척 갑갑해질 것이다.

화폐는 분업과 교환을 촉진하여 경제를 발전시킨다. 마치 원활한 혈액 순환이 신체의 건강을 증진하는 것과 흡사하다. 고혈압도 곤란하지만 저혈압도 문제다. 적당한 양의 통화가 적절한 속도로 공급될 때 경제시스템은 건강해진다. 화폐의 순환이 끊기면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처럼 경제가 멈추어 버린다.

화폐가 재화와 서비스, 즉 부를 저장하는 그릇임은 분명해 보인다. 예컨대 내가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해서 임금으로 10만 원을 받았다면, 나의 노동은 신사임당이 그려진 5만 원짜리 화폐 두 장에 고스란히 저장된 셈이다. 문제는 이 화폐를 노동을 하지 않은 자, 다시 말해 부를 생산하지 않은 자가 차지할 때이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일단 빼앗거나 훔치는 방법이 떠오른다. 사기를 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모두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법에 따라 처벌받는다. 상속과 증여도 노동 없이 부가 이전되는 경우이다. 하지만 자손에게 상속된 부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과거에 했던 노동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용인될 여지가 있다. 자식에게 물려주지도 못한다면 누가 열심히 일한단 말인가? 이 같은 항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지만 상속은 자연계의 보편법칙에 위배된다. 오직 인간만이 부를 대물림한다.

가장 나쁜 것은, 이미 가진 부를 이용해서 타인의 부를 쉽게 빨아들이는 수법이다. 부동산 자산을 이용한 지대 추구, 정보의 편향성을 이용한 시세차익 선점 등 여러 수단이 있다. 환율 등락, 금리 변동, 인플레이션, 거품 팽창 등의 경제현상 뒤에는 시장권력자의 의도적인 조작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월가의 큰손들이 시장을 움직인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도박이다. 도박은 세계적 규모로 이루어지고, 월가의 타짜들은 패를 훤히 들여다보며 눈먼 돈을 쓸어 담는다. 채권, 주식, 그리고 수천 종의 파생금융상품은 도박장의 칩이다. 그 칩 자체는 부(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지 못하지만 언제든 현금으로 환원할 수 있다. 도박꾼들은 칩을 현금으로 바꾼 다음 실물시장에 빨대를 꽂고 재화와 서비스를 마음껏 소비한다.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했음에도 왜 자신들의 부가 냄비 속의 수프처럼 졸아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화폐가 교환의 매개수단을 넘어 부를 지배하는 권능을 갖게 되면서 무노동이 노동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정부가 출현하기 전까지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엽고, 역하고, 잔인하며, 짧다”라고 묘사했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지금의 금융자본주의 세계가 딱 그러하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화폐의 역사를 좀 더 따라가 보자. <계속>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저작권자 © 스트레이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