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게모니의 역사가 말하는 한국 보수 참패의 원인
| 시대정신 읽지 못한 정치 보수, ‘갑질’로 얼룩진 경제 보수
| 위국爲國 아닌 당내 헤게모니에 매몰된 한심한 보수의 본산
| 안으로부터 제시될 희망과 비전 위해 모든 것 내려놓아야


6・13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참패한 자유한국당이 끝 모를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선거 이후 국회 로텐더홀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반성 퍼포먼스’까지 펼쳤지만, 당일 개최한 비상의원총회부터 삐걱거리더니, 박성중 의원의 휴대폰 메모로 친박과 비박 간 갈등에 다시 불이 붙으면서 자멸로 치닫고 있다.

선거 전후로 무릎을 꿇은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의원들(무릎을 꿇는 행위에는 통렬한 반성의 의미가 담겨있지만, 정국이 불리해질 때마다 무릎부터 꿇고 보는 통에 진정성을 상실, 코미디로 전락해버린 한국 보수의 위장무릎쇼)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선거 전후로 무릎을 꿇은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의원들(무릎을 꿇는 행위에는 통렬한 반성의 의미가 담겨있지만, 정국이 불리해질 때마다 무릎부터 꿇고 보는 통에 진정성을 상실, 코미디로 전락해버린 한국 보수의 위장무릎쇼)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홍준표 대표 사퇴 후 김성태 대표권한대행이 ‘중앙당 해체’, ‘당명 변경’ 등의 쇄신안을 내놨지만 표류 중이고, 혁신비상대책위를 출범시키기 위해 안상수 의원 등 6명으로 준비위원회도 꾸렸지만, 상대 진영을 도려낼 수 있는 차기 총선 공천권 싸움으로 난리북새통이다. 반성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친박계는 김성태 대표권한대행, 김무성 의원, 김용태 의원, 김영우 의원 등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바른정당으로 갔다가 다시 슬며시 돌아온 이른바 ‘복당파’가 어용 비대위를 통해 김무성 의원을 대표로 앉힌 다음 친박계를 도려내려 한다고 날을 세우고 있다.

반면 비박계는 원죄인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당시 대통령에 기대 정치한 사람들에 대한 확실한 인적 청산에 나서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전・현직 원외당협위원장 모임인 ‘자유한국당 재건비상행동’은 정계 은퇴 1차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에는 친박계 최경환, 홍문종, 김재원, 윤상현 의원, 복당파 김무성, 김성태, 김용태, 홍문표 의원, 박근혜 정부에서 일한 이주용, 곽상도 의원 등이 포함돼 있다.

비박계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참패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정말 그럴까? 친박계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보수의 좌표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을 먹고 산다. 주요 견제세력인 한국당이 하루빨리 정확한 원인을 진단해 새 좌표를 설정해야 하는 이유다.

보수와 진보는 어떻게 성장해왔나?

‘변화’라는 키워드로 세상을 바라보면, 크게 두 가지 부류가 보인다. 지금의 상태를 지키며 안정적, 점진적 변화를 원하는 쪽과 급진적 개혁에 방점을 찍는 쪽이다. 지키려는 쪽은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그다지 불만이 없고, 바꾸려는 쪽은 불만이 많다.

지키려는 보수주의, 바꾸려는 진보주의(자료:WSJ/디자인:김현숙)
지키려는 보수주의, 바꾸려는 진보주의(자료:WSJ/디자인:김현숙)

돈과 명예, 지위 등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는 사람, 세상은 이런 사람을 ‘보수적保守的’인 사람으로 분류한다. 보수란, 보전하고 지킨다는 뜻이다. 제기된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사람은 그 문제를 바꾸는 과정에 감당해야 할 위험 대신 문제를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지금 가진 것마저 빼앗길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수적인 사람은 과거 또는 현재 지향적이다.

가진 것이 없어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 세상은 이런 사람을 ‘진보적進步的’인 사람으로 분류한다. 진보란, 걸음을 내딛어 나아간다는 뜻이다. 제기된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사람은 그 문제를 바꾸려 한다. 문제가 유지된다면 자신의 상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적인 사람은 미래 지향적이다.

세상은 위 두 가지 부류를 보수, 진보라 부른다. 그리고 뒤에 ‘주의ism’라는 말까지 붙여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라는 두 가지 프레임으로 명확히 가른다. 전 세계를 통틀어 보수와 진보로 나뉜 국가들 치고 적대적인 과거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보수에게 진보는 불만덩어리 모험쟁이이고, 진보에게 보수는 전통의 답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는 ‘이념’이나 ‘가치’가 아니라 ‘성향’ 또는 그 성향을 담아내는 ‘그릇’의 문제다. 세상이 그렇게 바뀌어왔다.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프랑스 시민혁명이 발발한 지 3년 후인 1792년, 공화제를 수립하기 위해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소시민과 농민, 무산계급을 대표하는 급진파들은 공회 왼쪽 편에, 부르주아, 유산계급을 대표하는 온건파들은 공회 오른 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을 ‘자코뱅’, ‘지롱드’라고 불렀다.

이후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밖에 없던 지구상 경제지형에 대변혁이 일어났다.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들고 나섰던 것이다. 그가 제창한 학설은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단숨에 세계 정치지형을 양분하는 이념의 위치에 올라섰고, 자코뱅과 지롱드의 경제적 전선은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전선으로 대치되었다.

헤게모니(hegemony)의 역사에 숨겨진 한국 보수 참패의 원인

“어느 사회의 지배계급은 물리적 강제력만으로 다른 계급을 지배하지 않는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자발적인 동의를 통해 지배한다. 동의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가치관 및 세계관을 받아들임으로써 얻어진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헤게모니다.”

칼 마르크스의 이념에 따라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을 창설한 혁명적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가 한 말이다. 그의 말은 한국에서 그대로 구현됐다.

1945년 해방 직후 정권을 장악한 쪽은 보수 우파인 한민당이었다.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집권한 쪽 역시 이승만 정권을 탄생시킨 보수 우파였다. 한국전쟁으로 강화된 보수 우파의 입지는 5・16군사쿠데타를 거치며 더욱 공고해졌다.

이후로도 보수 우파의 최대 토양인 ‘반공’과 ‘안보’는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로 작용했다. 피지배계급인 국민은 보수 우파가 제공하는 반공과 안보의 가치관을 세계관을 받아들이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실정이 드러나려 할 때마다 박정희 정권이 수많은 가짜간첩단을 만들어 낸 이유도 우민화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또 다른 군부쿠데타로 집권하면서 보수 우파의 헤게모니는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멈추지 않은 반공・안보 헤게모니의 계보(왼쪽부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멈추지 않은 반공・안보 헤게모니의 계보(왼쪽부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념 대결의 종말이 예고되고 있었다. 첫 단초는 1980년대 말에 불어 닥친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이었다. 이어서 베를린장벽이 무너졌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마저 해체됐다. 이런 상황을 두고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종말과 마지막 인간>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의 마지막 정부 형태”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국내적으로도 진보 성향의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이념의 색채가 엷어졌다. 그럼에도 ‘반공’만 빠졌을 뿐, 국내 정치의 헤게모니는 여전히 ‘안보’를 외치는 진영의 몫으로 남았다. 세계 유일의 분단 상황, 그리고 북한이 대북제재 해제를 위한 도구로 핵개발을 택했기 때문이다. 보수 우파의 헤게모니는 여전히 강력했다.

공산・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후쿠야마의 예측은 거의 현실이 되는 듯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진보 진영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진보 진영은 ‘낡아빠진 이념에 목을 매다가 몰락해버린 바보’쯤으로 취급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보수 우파의 패착은 거기서부터 비롯됐다.

보수 우파는 자유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던 공산・사회주의의 패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공산・사회주의는 몰락하기 전에 이미 ‘사회적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베른슈타인의 ‘사회민주주의’, 마오쩌뚱의 ‘마오쩌뚱주의’라는 우량아를 탄생시켜 놓았다. 승리감에 젖어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제국들과 중국이 사회주의의 장점을 날개에 장착하고 있음을 간과한 채 방심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인류 최후의 정부 모델이 될 거라는 후쿠야마의 예측은 한국에서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진보 진영은 일찌감치 전쟁 대신 평화를 들고 나섰다. 스칸디나비아 제국들로부터 사회적 시장경제를 배워 와 차가운 경쟁과 실적 위주인 자본주의에 ‘사람의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민간 부문, 특히 시민단체의 거버넌스(governance)를 강화하기 위한 활동도 병행했다.

안보 헤게모니를 파고든 진보의 계보(왼쪽부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안보 헤게모니를 파고든 진보의 계보(왼쪽부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그 결과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을 배출했고, 평화를 위한 노력과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한국적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파고들면서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갔다. 유산계급의 입장을 대변하며 ‘안보’만 외쳐대던 보수 우파의 헤게모니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당시 한국의 보수 우파는 이런 가치관의 변혁 과정에 눈감았다. 그들에게 한반도의 정전상태는 지속되어야 할 헤게모니의 중요한 도구였다. 진보와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안보를 빼버리면 ‘유산계급 옹호’밖에 남지 않고, 그것만으로는 힘겨운 싸움이 불가피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보수 우파는 입으로만 평화를 외칠 뿐, 안보를 더욱 강화하는 조치에 들어갔다. 이명박 정권 당시 제2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에 이은 5・24조치나 박근혜 정권의 개성공단 일방 중단이 그런 조치들이다. ‘비핵・개방・3000구상’과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알맹이 없는 두 정권의 대북정책에서 국민이 느낀 것은 ‘변화’가 아닌 ‘정체’ 또는 ‘퇴행’이었다.

안보 헤게모니 종말의 계보(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안보 헤게모니 종말의 계보(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해 지속되는 보수 우파의 ‘대국민 안보 위협’은 박정희 정권이 자행했던 ‘가짜간첩 만들기’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갈수록 증대되는 전쟁에 대한 우려 및 안보 불안감에 국민들은 지쳐갔다. 끊임없이 주입되는 ‘안보’라는 물리적 강제력 탓에 하나 둘 자발적 동의를 철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수 우파는 속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주사파 정부”, “위장평화쇼”, “좌파 빨갱이” 등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뱉어낸 발언들에 ‘철지난’이라는 딱지가 붙어버린 이유다.

2018년 오늘, 국민을 등에 업은 정치적 진보는 과거에 매여 시대정신을 읽어내지 못한 보수 정당의 머리에 철퇴를 내리쳤다. 경제적 진보는 그동안 기계적 균등을 내세우며 뒤로는 온갖 불평등 행위를 저질러 온 우파들을 ‘갑질’로 재정의해 강력 응징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국민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얻기에 충분하다. 진보 진영이 마침내 강력한 헤게모니를 쥐게 된 것이다.

‘70년 안보 향수’에 깊이 젖어버린 보수 우파, 그들이 간과한, 아니 애써 무시한 한국 정치의 경제적・이념적 좌표는 다음과 같다.

한반도 정당의 이념적 좌표 ⓒ스트레이트뉴스/그래픽:김현숙
한반도 정당의 이념적 좌표 ⓒ스트레이트뉴스/그래픽:김현숙

사회적 경제를 가장 강력하게 표방하는 정의당조차 우파로 분류된다. 신자유주의 기반인 우리 경제에 사회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하려 하기 때문이다. 북한 노동당을 빼고는 모두 우파 일색이다. 우리나라 정당 중에 홍준표 전 대표가 그렇게 주장하던 ‘빨갱이 좌파’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안보 헤게모니’를 잃어가는 자칭 ‘보수 우파’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었을 뿐이다.

박근혜 정권 국정농단 사태와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보수의 가치에 묶여 있던 한국사회의 근본 기류가 기회균등, 분권, 공존, 평화 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당은 그런 가치 변화의 흐름을 외면했고, 보수 유권자들은 2016년 이후 한국당이 진짜 보수가 아니라는 사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좌파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민주당이 자신들의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안보 헤게모니의 마지막 집행자와 가치 변화를 읽어낸 진보의 계승자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안보 헤게모니의 마지막 집행자와 가치 변화를 읽어낸 진보의 계승자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프랑스혁명 이후 진행되어 온 좌우파 헤게모니의 역사는, 이처럼 한국 보수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동의를 철회하게 만든 ‘낡은 수구적 가치관 및 세계관’이다.

“수구 기득권, 낡은 패러다임에 머문 보수는 탄핵 당했고 저희는 응징 당했다. (중략) 구태와 관습에 안주하는 기득권 보수가 아니라 수구와 냉전, 반공주의에 매몰된 낡은 주종을 스스로 혁파하고 국민적 인식과 정서에 부합하는 정의로운 보수의 뉴 트렌드를 만들어 갈 것이다.”

김성태 대표권한대행이 18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작심하고 한 발언이다. 수구 기득권과 보수의 이념을 해체해야 한다는 의미다. 적어도 김 대행의 시각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단에 매우 근접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 대행의 시각에 동의하는 당내 의원들의 말도 들어보자.

“(이번 선거로) 안보 문제에서 우리만의 생각에 매몰된 것이 분명해졌다.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국민의 간절한 소망, 여기에 부응하려고 하는 집권세력의 노력을 일방적으로 폄하했다.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이해하고 깨달았는지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김용태 의원-

“막말로 품격을 떨어뜨리고 대안도 없이 문재인 정부를 비판만 했다가 오히려 국민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과거 반공 보수에 의존하면서 어쨌든 북한의 도발을 없애고 한반도에 평화가 지속하도록 해야 한다는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김영우 의원-

이 정도라면 변화기에 접어든 국민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한국당이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반성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난파선 위 투쟁에 돌입한 한국당

그러나 당장 반발이 튀어나왔다. 친박계 김진태 의원은 “원내대표의 발언은 당황스럽다. 국정농단 세력, 적폐 세력, 수구 냉전 세력임을 인정하고 반성하자니? 반성도 좋고 혁신도 좋지만, 반성하다가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섣부른 좌클릭은 더 문제다”라며 선거 패배의 원인을 “홍 대표 체제와 북미회담이 겹쳤기 때문”으로 돌렸다.

그는 실망해서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콘크리트 우파가 30%나 된다는 허언까지 덧붙였다. 60%를 넘긴 투표율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한국 보수 우파의 헤게모니가 국정농단 및 수구 냉전적 태도에 의해 무너졌음을 인정하지 않는, 반성과는 거리가 먼 자세다. 이런 시각은 언론에서도 발견된다.

“민주화 이후 치러진 전국 규모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이런 정도로 이긴 적은 없었다. (중략) 최근 사법 권력까지도 진보・좌파 성향으로 짜였다. 언론의 정부 비판 기능도 거의 실종된 상황이다. 한국은 완벽하게 진보・좌파 쪽이 장악하게 됐다.”

6월 14일 조선일보 사설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래서야 보수 진영이 진정한 반성에 이르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철지난 색깔론으로 망한 판국에, 국내에 있지도 않은 좌파를 또 들고 나와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더 놀라운 사실은, 당 중진들을 향해 “책임지고 물러나라”고 외치는 한국당 초재선 의원들 역시 김진태 의원과 조선일보 사설에 동조한다는 점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한국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던 2012년과 2016년에 공천을 받았던 인사들이다. 전체 112명의 의원 중 초재선 의원은 무려 74명이나 된다.

의견을 개진 중인 자유한국당 초・재선 의원들(2018.06.25) ⓒ스트레이트뉴스DB
의견을 개진 중인 자유한국당 초・재선 의원들(2018.06.25) ⓒ스트레이트뉴스DB

그들은 김 대행을 향해 “복당파들이 무슨 자격으로 당을 좌지우지하려고 하는가?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김 대행의 퇴진을 요구 중이다. 결국 한국당은 반성 대신 친박계의 수구 보수냐, 친이계의 실용 보수냐 하는 계파 투쟁, 차기 총선 공천권 투쟁에 돌입하고 말았다. 국가를 위하는 당 대 당 헤게모니 싸움이 아닌, 난파선 상 당내 헤게모니 싸움 말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까? 당내에 보수 궤멸의 정확한 원인을 진단할 수 있는 인사는 없는가?

모두 내려놓고 참회와 자중, 난상토론 거듭할 때

많다. 당내 원로들이 그들이다. 그중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남덕우기념사업회’가 주최한 ‘대한민국의 보수: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살릴 것인가?’ 제하의 세미나에서 한국당의 죄목을 다음 7가지로 정리했다.

① 계파의 이익을 챙기느라 국민 전체의 이익을 돌보지 않은 죄
② 권력의 사유화에 침묵한 죄
③ 그럼에도 반성하지 않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죄
④ 막말과 품격 없는 행동으로 국민을 짜증나게 한 죄
⑤ 여당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대안 제시도 못한 죄
⑥ 희망과 비전을 등한시한 죄
⑦ 새로운 인물을 키우지 못한 죄

가치관과 세계관의 거대한 시대적 변화 및 그에 따른 헤게모니 전략은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선거 참패와 관련된 원인들은 진단됐다. 그렇다면 고쳐야 한다.

하지만 ①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②번에 대해서는 아직도 ③번이 유효하다. 당내 중진들은 ④번과 ⑤번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들 역시 ①번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지경이니 어떻게 ⑥번과 ⑦번을 기대할 수 있겠나.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70년 세월 동안 쌓아올린 보수의 자산이 내려앉는 데는 단 2년이면 충분했다. 지금처럼 계파싸움을 털어내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어떤 혁신위원장이 나서더라도 ‘한 지붕 두 살림’ 같은 임시봉합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연간 100억 원이 넘어가는 국고보조금과 국회의원에게 주어지는 한시적 특권, 초라한 당내 헤게모니로 연명하면서 조금씩 말라비틀어지는 참담한 결과를 맞고 말 것이다.

권력의 사유화가 진행되는 동안 동조한 인사들과 침묵한 인사들은 50보 100보 따질 것 없이 국민 앞에 엎드려야 한다. 당을 지키고 있었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건 마찬가지다. ‘권력 사유화당’에 남아 있었던 것이 무슨 큰 자랑거리라고 복당파를 욕한단 말인가?

계파색에 조금이라도 물들었던 인사들 역시 ‘나는 아니다’는 가면을 벗고 당내 헤게모니 쟁탈전을 즉각 중지해야 한다. ‘친박’도 모자라 ‘진박’을 자임했던 인사들이 뭘 한번 해보겠답시고 마이크를 잡고 나서는 꼬락서니, 키보드와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시민정치가들이 당신들의 과거 행적을 모를 것 같은가?

막말과 품격 없는 행동으로 보수의 위상을 갉아먹은 인사는 사퇴해 골방에 틀어박혀 있는 대신, 짜증난 국민들에게 사죄함으로써 보수 재건의 기초를 닦아야 하고, 그런 인사를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한 중진들은 자신들의 무능과 무위도식에 스스로 막말을 내뱉어야 한다.

이처럼 뼈저린 반성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보수 정당의 참패는 필경 보수 전체의 궤멸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잘잘못도 자존심도 따질 때가 아니다. “시간이 약”이라며 미적거리거나 “소나기는 피하자”며 숨죽이고 있을 때도 아니다. 보수 궤멸의 위기다. 대한민국 정치가 한쪽 날개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기다. ‘위장반성쇼’ 할 시간에 모두 다 내려놓고 난상토론에 참회와 자중을 거듭하라. 그럴 때라야 새로운 인물이 수혈될 것이며, 진짜 보수의 가치를 드러낼 희망과 비전이 안으로부터 제시될 것이다. 헤게모니는 그 다음이다.
김태현bizlin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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