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실종자 수·암매장 등 진실 밝혀야
"역사 왜곡 바로잡고 국민 통합 바탕 돼야"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최초 발포 명령자, 지휘체계 이원화, 사망자·실종자·행방불명자 수, 헬기 기관총 사격의 실체, 암매장, 군 자료 은폐·왜곡 경위 등 핵심 의혹들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5·18민주화운동의 가장 큰 과제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집단발포 명령의 전모를 밝히고, 발포 명령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1980년 5월21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이날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자행,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으며 항쟁기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21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이날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자행,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으며 항쟁기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 5·18기념재단 제공

5·18 당시 최초 발포는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께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이뤄졌다. 계엄군은 장갑차로 위협 시위를 벌이던 중 시민들에 둘러싸이자 공포탄 두 발을 공중에 쏜 뒤 M16 소총 실탄을 쐇다. 이 사격으로 김영찬(당시 조대부고 3학년)씨가 중상을 입었으나 5차례 이상 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첫 집단발포는 5월 20일 오후 11시께 광주역 앞에서 자행됐다. 3공수여단 군인들은 당시 '16대대 운전병이 시위대 차량에 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역사를 뒤편으로 하고 일렬로 도열한 채 사격했다. 시민 5명(김재화·이북일·김만두·김재수·허봉)이 숨졌고, 부상자는 최소 11명이 넘었다. 11공수여단은 다음 날인 5월21일 오후 1시께 옛 전남도청과 금남로에서 집회를 열던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순간 집단 발포했다. 

당시 계엄군은 비무장 상태의 시민에게 조준 사격을 했다. 최소 시민 54명 이상이 숨지는 등 5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계엄군은 전남도청 최후 진압작전 등으로 무고한 시민 수백 명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현재까지 발포 명령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1988년~1989년 국회 청문회, 1995년 12·12 및 5·18 검찰 수사, 1997년 대법원 판결,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 2017년 5·18 헬기사격 및 전투기 대기 관련 국방부 특조위 조사 등이 진행됐다. 하지만 끝내 최초 발포 명령자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5·18 당시 신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씨는 최근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 투입에 개입하지 않았다' '발포 명령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옛 도청 앞 발포 이후인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30분께 시민들의 무장이 최초로 이뤄졌다'는 각종 기록(전남경찰청 보고서 등)이 나왔지만, 신군부는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가 이뤄졌다'는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

국방부 특조위에 제출된 '7공수 특전여단 35대대 상황일지' '11공수여단 진압작전 수기' 내용 등을 종합하면, 계엄군은 군중에게 집단 발포(5월21일 오후 1시)를 한 이후 사실상 사격 명령인 자위권 발동(5월21일 오후 1시30분)을 내렸다는 의혹만 나오고 있다.

발포 명령에 대한 혼선은 지휘체계의 이원화와 연결돼 있다. 공식적인 지휘체계(형식상 계엄사령부-2군사령부-전투교육사령부-31사단-3·7·11공수여단)와 달리, '보안·특전사령관 전두환·정호용'으로 이어지는 별도 지휘체계에 따라 부대가 운용됐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20일과 21일 광주역과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가 발생했지만, 3공수여단장과 11공수여단장은 상급자인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사법당국은 1997년 특전사령관 정호용이 공수부대 증파 결정·전교사령관 교체 등 중요한 결정에 직접 관여하고 수시로 3개 공수여단장들과 진압 대책을 논의하며 작전 지휘에 개입했다고 인정한 바 있다. 1980년 5월24일 광주 송암동과 호남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에서 계엄군끼리 '오인사격'에 의한 군인들의 대량 희생 등도 지휘체계의 이원화에서 비롯된 사례들이다.

행방불명자와 이들의 암매장 여부도 여전히 안갯속에 있다. 5·18기념재단은 지난해 11월부터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부지, 옛 화순 너릿재터널 인근, 서구 치평동 옛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인근에서 암매장 발굴·조사를 진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헬기 기총 소사 또한 전일빌딩 탄흔 발견과 특조위 조사로 국방부가 공식 인정했지만, 실제 조종사와 사격 장소·목적 등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5·18 사망자 숫자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다. '걸어 다니는 5·18백서'로 불리는 정수만(72) 전 5·18 유족회장이 정사 편찬을 위해 정리한 5·18 사망자(1980년 5월18~27일 사망)는 165명, 부상 후 사망자(5월28일 이후 사망) 561명, 실종자는 67명 등 793명이다.

이에 반해 광주시·전남도가 발간한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 지역 사회운동사'에는 '5·18 유공자 5517명 중 사망 155명, 행방불명 81명, 상이 후 사망 110명' 등으로 기록돼 있다. 군 비밀 조직의 5·18 관련 자료 왜곡·은폐 경위, 신군부와 미국의 관계, 대검 양민 학살, 시외곽 양민 학살,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 조작, 5·18 항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인권 유린 실체 등도 밝혀야 할 과제로 꼽힌다. 
 
군 당국 기록, 은폐·자위권 대응 논리 등 왜곡 실마리
진상규명조사위 성공적 활동·학계 연구 공유도 필수

5·18민주화운동 진실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역사 왜곡·폄훼는 여전하다. 전두환 씨의 회고록을 비롯해 각종 출판물과 웹사이트 등지에서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다' '5·18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해 일으킨 폭동' '임을 위한 행진곡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내용 등의 허위 사실이 퍼지고 있다. 

제38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열린 5·18민중항쟁 전야제 행사에서 유가족들이 행진하고 있다. / 뉴시스
제38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열린 5·18민중항쟁 전야제 행사에서 유가족들이 행진하고 있다. /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주요 원인 제공자였다' '도청 진압 작전 때 계엄군은 1명도 사살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전혀 다른 주장도 '문재인의 5·18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라는 책(저자 필명 김대령)에 담겼다. 이는 군 당국이 5·18 당시 발포 경위·사망자 수, 부대 투입 일시·장소, 최초 사격 근거 등 불리한 사실을 왜곡·은폐하면서 비롯됐다. 

작년 9월11일부터 지난 2월 10일까지 활동한 '5·18 헬기사격 및 전투기 대기 관련 국방부 특조위'는 1996년 기무사가 5·18 관련 기밀자료를 모두 불태웠고, 범정부 차원의 5·18 민주화운동 왜곡 군 조직이 운영된 사실을 밝혀냈다.  

1988년 5·18 국회청문회 대응 군 비밀 조직인 511연구위원회 등은 사격 지시와 관련된 군 관계자들의 증언을 삭제시키거나 전투상보를 비롯한 5·18 관련 군 자료를 위·변조했다. 발포는 자위권 발동에 따른 것이며, 당시 임무수행자의 상황 판단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신군부의 대응 논리를 만들어 왜곡의 단초를 제공했다. 

5·18 기념재단은 국방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은 자료(5000쪽 분량)를 토대로 이달 초부터 군 당국이 5·18 관련 기록물을 어떻게 왜곡·은폐했는지 조사 중이다.

역사 왜곡에 대한 법적 대응도 진행 중이다. 전두환 씨는 회고록에서 북한군 투입설을 인용, 법원으로부터 출판·배포 금지 가처분 명령을 받았고, 5·18 당시 계엄군의 기총소사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비난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앞두고 있다. 

5·18 기념재단은 각종 왜곡 서적에 5·18과 관련된 특정인 또는 집단을 지칭해 명예를 훼손한 내용이 있는지 살피며 법리 검토를 하고 있다. 5·18 전후 미국 군사·외교 기밀문서 국문 번역도 마무리됐다. 분석 결과가 나오면 1980년 당시 신군부와 미국의 관계, 집단발포 배후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전망이다.

지난 3월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을 근거로 오는 9월 국가 차원의 5·18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도 꾸려진다. 각계 전문가들은 국가가 5·18 당시 저지른 학살·폭력을 공식 인정하고, 국민 통합에 기여할 수 있도록 특별법 시행령 등을 보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진상규명위의 성공적 활동을 위해 ▲시행령 입법 대응 ▲군 핵심 자료 확보 및 군 기밀문서 공개 전환 방안 마련 ▲조작된 5·18 군 자료 실체를 파헤칠 연구 적임자 선정 ▲민간 전문가 다수 참여 보장 ▲위원장·위원·조사관 선임 시 철저한 검증 ▲5·18 미해결 과제 조사 방향 설정 ▲5·18 관련 검찰 수사 및 재판 기록 분석 등을 함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군 자료의 공유 ▲5·18 연구자 양성·지원 ▲가해자 처벌 등도 진실 규명과 사회 통합의 전제 조건으로 꼽힌다. 

최용주 5·18 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계엄군에 의해 광주에서 최소한 무고한 시민 160여 명이 숨졌지만, 전두환·노태우·정호용에게 적용된 내란목적 살인행위는 (1980년)5월27일 진압작전 과정에서 숨진 17명뿐이다. 나머지는 자위권 발동에 따른 정당방위로 인정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포괄적 진상 규명 없이 형사법적 판단에만 의존했고 과거 청산에 대한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아르헨티나 정부는 1976~1982년 군사독재정권 범죄자들을 사면했다가 2006년 사면법을 무효화하고, 재판에 회부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신군부 세력을 충분히 처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사회 통합 차원에서 사면·용서는 처벌 다음의 문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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