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되어 비가 긋자, 마을은 짙은 안개에 잠겼다. 차양 아래 앉아 머리를 텅 비우고 커피를 마시기 좋은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오늘은 일요일이어서가 아니라 우요일(雨曜日)이어서 쉬었다. 비가 와서 놀고 결혼식에 가느라 빠지다 보니 사월에 스무하루 일했다.

내 친구 권 반장은 한 달 서른닷새 일한다고 소문난 사람이다. 일과 후에는 잔업을 뛰고, 비가 와도 어떻게든 일을 만들어서 한다. 한마디로 독종이다. 나는 죽었다 깨도 그렇게는 못한다.
 
건설회사에 출근하는 일당쟁이가 나까지 일곱 명이다. 권 반장 빼고는 다들 비를 반긴다. 어제는 권 반장네 밭일을 돕느라 고추 말목 수백 개를 중망치로 두드려 박았다. 손목이 시큰거릴 줄 알았는데 다행히 괜찮다. 

매년 이맘때면 두견새가 시시로 울어댄다. 옛날에 못된 시어머니가 있었다. 며느리에게 작은 쪽박으로 쌀을 퍼서 밥을 짓게 했는데 시부모 밥상을 차리고 나면 밥이 부족해서 며느리는 늘 배를 곯았다.

어쩌다 시누이가 친정에 오면 큰 쪽박으로 쌀을 퍼주었다. 결국 며느리는 굶어 죽었다. 어느 날 며느리 무덤가에서 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오르더니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쪽박 바꿔, 쪽박 바꿔." 

회사 창고에 걸어놓은 슬링바에 박새가 둥지를 틀었다. 슬링바를 쓰려던 일꾼은 꼬물거리는 새끼들을 보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친구들, 당분간 요놈은 쓰지 마."
 
문득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오 씨가 생각났다. 달동네가 철거되던 날, 올망졸망 오남매를 데리고 살던 오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때 알았다.

일꾼 한 사람이 노상 나를 '현 씨'라고 부른다. 연배가 비슷해서 친구 삼으려 했는데 곁을 잘 내주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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