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나도 피해자다) 열풍에 페미니즘이 전국민적 이슈로 떠올랐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페미니즘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싶다. 사전을 찾아보면 페미니즘은 '여성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페미나(femina)'에서 파생한 말이다. 성 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 때문에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해방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알들 모를듯 세계적인 이슈로 부상한 페미니즘은 과연 무엇일까. 스트레이트뉴스는 페미니즘 이해를 돕는 책을 연이어 추천한다.

20세기 현대문학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위치는 너무나 크고 분명 독보적이다. 그녀를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호칭 중 하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는 모더니즘 작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페미니즘 작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번째 호칭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같이한 것은 아니다. 특히나 리얼리즘 계열의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그녀의 페미니즘을 호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들은 사실 리얼리즘 비평의 쇄도가 사라지는 것과 같이 그 목소리의 힘을 잃어갔고 후기 구조주의와 해체비평이 시작된 이후에 그녀의 문학 세계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발해져 깊고 다양한 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페미니즘의 교과서라 불리는 <자기만의 방>은 1928년 케임브리지의 여자 단과대학에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부탁한 강연회를 위해서 씌어진 글을 수정하여 출간한 것으로, 페미니스트 문학론과 여성 작가론, 그리고 페미니즘 일반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다.

다른 페미니즘 비평서들이 여성의 평등과 해방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목소리로 호소하는 것과 다르게 이 책은 여러 명의 화자를 등장시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그로 인한 분노를 갖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분노가 현상주의적 투쟁으로 나아가지 않고 근본적인 현실 변혁의 지혜를 독자 스스로 얻을 수 있게 하는 울프 특유의 구조를 갖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몇몇 리얼리즘적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울프의 작품들이 갖는 이러한 다중적 관점과 다층적 구조의 형식이 바로 그녀의 문학관에 이어지고 있음을 이해할 때 울프의 페미니즘 또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문학 여정이 여성 해방을 위한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는 여정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다소 난해한 구성이라든가 필자의 뚜렷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설득하는 방식을 피하는 방식들은 기존의 남성적 글쓰기를 벗어나 울프 자신의 글쓰기, 페미니스트적 글쓰기의 창조를 위한 것이다.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고 사실상 다종다양한 문학의 주요 독자 또한 여성인데도, 심지어 소설 작품 속엔 차마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성 인물들이 등장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작가는 남성이었다. 그야말로 문학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울프는 먼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의 경험을 반추해 본다. 여성에게 문학적 재능은 과분하거나 당찮은 것일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여성은 글을 쓸 수 없었고 작가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그러면서 울프는 여성 작가로서 참고할 수 있는 선대의 여성 작가들을 헤아려 보지만 따끔한 갈증이 느껴질 정도로 부족하다는 사실만을 깨닫는다.

그래서 도서관으로 찾아가 서가를 들여다보며 다른 거장의 작품들을 살피고 거기에 맞서 보려고 하지만, 남성들이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을 그곳에 입장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나마 20세기, 여권이 신장됐다고 하는 당시(여성이 재산을 소유하고, 참정권까지 얻어 낸 그때)에도 이러했는데, 더 먼 옛날에는 어떠했을까.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정윤조 옮김(문예출판사·2011)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정윤조 옮김(문예출판사·2011)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교육은커녕 번듯한 직업조차 가질 수 없고,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수많은 여성 작가들(또는 작가를 꿈꿨을 여성들)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때 울프는 저 유명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똑같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여동생의 이야기’를 꺼낸다. 남성 셰익스피어는 가정을 버리고 런던으로 도망가 극단을 이끌고, 각계 인사와 유쾌하게 농지거리를 하며 왕궁에까지 진출해 여왕의 엄격한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었을 테지만, 여성 셰익스피어는 런던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미 남성 사회로부터 배제당하며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그러다 자포자기한 그녀는 (독신 여성에게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변변찮은 남편을 만나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어머니로 살면서 결국엔 작가로서의 인생을 완벽히 폐기 처분당하고 말았을 터다. 

울프는 굳이 이런 가상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오늘날 거장 반열에 오른 브론테 자매와 노처녀라고 구박받으며 조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주변 가족들의 참견에 시달리며 마땅한 서재조차 가지지 못한 채 거실 한구석에서 문학적 열정을 불태워야만 했을 제인 오스틴의 삶을 살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제인 에어>를 남긴  샬럿 브론테의 이야기다. 이것을 들으면 가슴이 저절로 저릿해진다. 여자로서는 작가로 나설 수도, 홀로 독립할 수도 없었던 당시에 샬럿 브론테가 글을 쓰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버지의 서재를 훔쳐보거나 황야를 거닐며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지붕 위로 올라가 저 먼 마을을 건너다보며, 그곳의 사람들과 자유롭게 부대끼고 싶다고, 밤새 쏘다니며 남성 문학가들이 일상이라고 이야기하는 인생을 살아 보고 싶다고 바라고 또 바란다. 이 장면은 여성 작가, 아니 역사적으로 모든 여성들이 처해 있던 비극적인 상황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하지만 울프는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천재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던 여성 작가들 덕에, 여성 문학의 오늘과 내일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고 선언한다.

물론 여전히 여성 문학은 도서관의 서가를 채우기엔 역부족하고 현재 상황도 여성이 글을 쓰고 독립적으로 살기엔 어려움이 많지만,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가 있었고 이름 모를 수많은 여성 문인이 있었으며 이러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 버지니아 울프가 존재했다는 건 여성으로서 글을 쓰고자 하고 소설가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겐 분명 고무적인 일일 터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부인하거나 누군가에게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울프가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통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요란한 웅변을 토하지 않는 울프의 페미니즘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투쟁으로서의 여성 운동 차원을 넘어, 가부장제가 강요한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남성과 여성 모두의 해방을 꿈꾸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서구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가부장제의 철학인 형이상학이 요구하는 이분법적 사유, 그로 인한 좋고 나쁨의 구별, 여성/남성의 구분, 근본적 진리의 환상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그 모색 방법을 우리 스스로 새롭게 찾아나서야 함을 역설한다.

특히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문학을 내용 면에서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구현한 작품으로 울프의 깊고 풍성한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시대가 바뀌어 여성의 지위는 많이 향상됐으나 지금도 자기만의 방을 애타게 갈구하는 여성, 그 방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여성이라면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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