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즘 공부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평소에 공부는 5시간 이상 꾸준히 해 왔는데 막상 전 공부는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신기하게도요.  요즘은 한국 시스템이 명문대 가려고, 취업해서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공부를 하잖아요, 근데 생활에 별로 필요없고 잊을 수 있는 수학과 영어, 사회 등을 왜 해야 되나요?
 

저는 선생님들에게 공부가 왜 중요한지, 왜 해야 되는 지 물어봤습니다. 선생님들의 답변은 "그건 쓸데없는 생각인데." "너다운 너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적으로 꼭 배워야 하는 거야." "현실적으로 좋은 대학을 가려면 열심히 공부해야지.“ "나도 아직 그 답을 찾고 있는 중이야."
 

이렇게 답변을 해주셨어요. 아무도 공부에 대한 기본적이고 명예로운 답변, 그리고 공부가 중요한 인간으로서의 필요성 등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공부는 왜 중요하죠?“

2년 전 한 초등학생으로부터 받은 장문의 글이다. 당시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었다.
 
이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모 선생님처럼 "쓸데없는 생각인데?" 하고 넘어가도 괜찮을까요? 저는 "나도 그 답을 찾고 있는 중이야"라고 말한 선생님이 가장 솔직하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죠. 대답을 유보했으니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인생에 정답은 없어."라고 말하면 일단 곤란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정답을 찾아야 합니다. 정답이란 말을 '진리' 혹은 '진실'이라고 바꾸면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은 정답 또는 진리가 나중에 오답이거나 오류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여전히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과거시험을 준비하듯이 공부합니다. 성균관을 명문대로, 소과(小科)를 수능시험으로, 대과(大科)를 사법고시·행정고시·외무고시로, 잡과(雜科)를 기술고시로, 무과(武科)를 육사·해사·공사 입학시험으로 바꿔 말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싶습니다. 대기업의 임원은 대지주의 마름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네요. 보수와 진보의 정파 싸움은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결에, 이념 논쟁은 이기론(理氣論)을 둘러싼 치열한 철학 논쟁에 빗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의 사대부가 군역을 면제 받았듯이 오늘날의 고위관료와 있는 집 자식들 중에는 병역면제자가 많습니다.

사민주의가 보편적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는 유럽 사회에서는 교육을 '공공의 투자'로 인식합니다. 유럽에서 대부분의 대학교육이 무상인 까닭은 국가가 투자한 교육비가 '우수한 기술과 지식'의 형태로 사회에 환원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부가 오로지 개인의 출세 수단이라면 국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할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젊은이들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짊어지고 사회에 진출하지만 유럽의 젊은이들은 지식과 기술이란 밑천을 지니고 사회에 나갑니다. 한국 사회에서 빚 대신 얻은 졸업장과 스펙에 대한 보상은 비정규직과 조기퇴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가 행복하겠습니까? 유럽식 사회주의와 미국식 개인주의, 경쟁력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만 어느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지 정직하게 말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교육은 국가가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는 '개인의 욕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이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고 어떤 태도로 공부하느냐? 이에 대한 대답은 그 사회의 성격을 드러내는 현상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실판단의 문제입니다. 어떤 욕구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어떤 태도로 공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가치판단의 문제입니다. 위 학생의 질문에 대한 선생님과 친구들의 답변에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치를 중심에 놓고 대답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공부를 왜 해야하는 지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공부의 궁극적 목적은 '앎'이라고 단정합니다. 배고파서 밥을 먹듯이 알고 싶어서, 알기 위하여 공부하는 겁니다. 도올 선생이 "공부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지 않는 과정"이라고 설파하셨는데, 공부에 대하여 이보다 적확한 정의(definition)도 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전율을 느꼈습니다. 요리사가 새로운 재료와 조리 방법을 연구하고 실험할 때 그의 삶은 공부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공부가 곧 삶이고, 삶이 곧 공부입니다. '앎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 아니겠습니까? 저 산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는지, 멧돼지는 어떤 길로 잘다니는지, 왜 불에 익힌 고기가 맛있는지, 왜 우리 아빠는 목숨을 걸고 사냥한 고기를 사냥에 참여하지도 않은 내게 먼저 먹이는지, 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지, 비가 오면 왜 곡물이 잘 자라는지, 해는 왜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지, 밤하늘의 별자리는 왜 계절마다 달라지는지, 왜 이웃마을 처녀가 쌀쌀하게 대하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지, 왜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은지, 왜 나는 이렇게 사는지, 왜 사람은 죽는지, 사람에게는 알고 싶은 것 투성이입니다.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의 답을 우연히 깨닫게 되면 기쁨에 차 소리 지릅니다. 유레카!!

공부의 궁극적 목적은 '앎'

 배고파서 밥을 먹듯이 알고 싶어서,

알기 위하여 공부하는 겁니다.

공부가 곧 삶이고, 삶이 곧 공부

공부는 분명히 즐거운 과정인데, 왜 우리 아이들은 공부 때문에 힘들어할까요? 저는 공부의 목적과 수단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런 대답이 나오는 것이죠. 일류대학 가기 위해 공부한다,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공부한다, 공무원 시험 보려고 공부한다, 자격증 따려고 공부한다. '위해서' 앞에 오는 말들을 한마디로 간추리면 '점수'입니다. 남보다 우월한 점수. 남보다 우월한 소득, 남보다 우월한 지위와 목적으로부터 분리된 공부는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종료됩니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나면 그동안 공부했던 것들이 거짓말처럼 휘발해 버리고, 자격증을 따고나면 더 이상 문제집을 들출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런 공부는 즐거운 과정이 아니라 노역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진짜 공부는 평생 지속됩니다.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것은 끝이 없으니까요.

저는 공부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다시 말해 공부가 '점수 따기 위한 수단'에서 '앎을 위한 놀이이자 삶 그 자체'로 전환되지 않는 한, 헬조선 시대는 매우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가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지금의 청소년들이 자라서 노동과 생산을 떠맡게 될 다음 시대에는 어떻겠습니까? 초고령화 사회와 맞물려 진정 끔찍한 시대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이 사회 를 이대로 놔두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공부의 본질에 대해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공부는 알고 싶은 것과 알아야 할 것들을 알기 위한 과정이고, 그 자체로 본능적 즐거움을 충족한다. "공부는 재밌고, 하고 싶은데"라고 말한 것은 매우 소망스러운 일입니다. 그 학생은 공부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합니다. 공부의 의미를 묻는 것이야말로 진짜 공부의 시작입니다. 공부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바로 공부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면 참 좋겠습니다만, 우리의 삶에는 '해야 할 것과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어와 수학도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은 삶에 쓸모가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외국어와 수학은 나중에 선택의 기회를 넓혀 줍니다. 철학 같은 과목은 수능에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되겠지요. 그러나 내가 왜 음악을 하는가, 하는 질문은 철학적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성우가 된다 해도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면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성우로서 익혀야 할 <연기론>을 공부할 때 미리 폭넓은 지식을 쌓아두지 않으면 책이나 강의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지식을 우리는 '교양'이라고 부릅니다.

장하준 교수가 쓴 책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 <히스토리 보이즈>라는 연극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못 봤지만 한국에서도 공연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영국 셰필드에 사는 학생들이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연극이라는데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어서 재인용합니다.

린토트 선생님 : 자, 역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럿지 군?
럿지 : 정말 제가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해도 되나요, 선생님? 그래도 안 때리실 거죠?
린토트 선생님 : 약속할게.
럿지 : 저한테 역사를 정의하라고 하신다면... 빌어먹을 일 하나 일어난 다음 또 빌어먹을 일이 이어지는 그런 빌어먹을 일의 연속이지요.

단지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서 하는 역사 공부라면 '빌어먹을 일'이라는 대사가 가슴에 와 닿을 겁니다. 수능 사탐과목으로 세계사를 선택하는 비율이 굉장히 낮습니다. 암기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은 또 얼마나 힘이 들까요? 알고 보면 역사만큼 흥미진진한 과목도 없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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