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생산라인 현장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생산라인 현장

최근 전세계를 강타한 반도체 공급부족 사태로 국내 자동차와 전자 등 산업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울산1공장 휴업을 결정한 데 이어 쏘나타와 그랜저를 생산하는 아산공장도 12~13일 이틀간 가동을 만춘다. 쌍용자동차도 지난 8일부터 평택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했고, 한국지엠 보령공장 역시 이달 중 공장 가동일을 9일로 줄일 예정이다.

이번 사태는 코로나19로 인해 노트북 등 가전 수요 급증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반도체 칩 공급이 지연되면서 자동차와 가전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다.

도요타, 폭스바겐, 포드 등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도 조업단축에 들어가는 등 공급부족으로 생산에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는 형국으로, 미국 정부는 공급 부족에 따른 타격을 완화하기 위해 자국 내 생산을 늘리는 데 대한 인센티브를 검토하고 공급망의 취약점을 개선하는 등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 정부와 자동차 업계도 반도체 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실질적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차량용 반도체 부족은 세계적 현상인데다 공급 업체들이 하루아침에 공장을 증설하긴 어려워서다. 

우리나라는 메모리반도체는 세계 최강이지만 시스템반도체인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후발주자다. 이에 차량용 반도체를 포함한 시스템반도체에 대한 종합적인 국가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대란은 자동차 부품업체에도 타격을 줬다. 자동차 부품업체의 48.1%가 차량용 반도체 수급 차질로 감산을 하고 있고, 72%는 수급 차질이 올해 말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한국자동차산업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반도체 수급 문제로 20% 이내로 감산한 업체는 64%, 50% 이내로 감산한 업체는 36%로 나타났다. 도요타와 폭스바겐, 포드, GM, 혼다 등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은 이미 연초부터 줄줄이 일부 공장을 닫거나 생산을 줄이고 있는 상황이다.

시장정보 업체 IHS마킷은 반도체 부족으로 올해 1분기 자동차 생산이 100만대, 일본의 노무라증권은 2분기 생산량이 160만대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컨설팅회사 앨릭스파트너스는 올해 전 세계 자동차 업계는 반도체 부족으로 매출이 약 606억달러(약 69조원) 감소할 것으로 관측했다.

반도체 부족은 가전업체에도 영향을 가할 전망이다. 이미 세계적 가전업체인 월풀이 마이크로컨트롤러 부족으로 전자레인지와 냉장고, 식기세척기 등의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고, 중국 가전업체인 항저우 로밤 어플라이언스는 신제품 출시를 연기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업계는 당장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는 차량용 반도체를 확보하기 위해 대만 정부는 물론 TSMC 측과도 협의를 진행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반도체 위탁생산 1위 업체인 TSMC로서는 미국, 유럽, 일본 등 열강들로부터 공급 압력을 받는 마당에 우리나라에만 물량을 늘려주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자동차 부품 업체들도 동분서주하고 있으나 10배 안팎의 웃돈을 줘도 구하기가 어렵다며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수요 급증 국면에서 세계 1∼3위 차량용 반도체 업체가 모두 생산 차질을 빚은 데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수요 예측 실패로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은 잇단 재해와 사고, 휴대폰·가전용 반도체 우선 생산 등으로 더욱 심화했다.

우리나라는 메모리반도체는 세계 최강이지만 글로벌 반도체 시장 비중이 70%인 비메모리반도체(시스템반도체)는 약체로 평가된다. 차량용 반도체는 세계시장 점유율이 2.3%로 미국(31.4%), 일본(22.4%), 독일(17.7%) 등에 비해 취약한 수준이다.

특히 차량용 반도체는 다품종 소량 생산 품목인데다 첨단 공정이 아니어서 수익성은 떨어지지만, 국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우리도 자체 생산 역량을 갖춰야 하며, 정부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협력해 반도체 생산 라인의 일부를 차량용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이런 가운데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응하기 위해선 미래차 전환 과정에서 수요가 늘어날 고성능 반도체 시장을 노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은 12일 산업동향보고서에서 최근 수급 차질이 가장 큰 품목은 차량의 전장 시스템을 제어하는 마이크로 콘트롤 유닛(MCU)으로, 대만 TSMC의 반도체 주문 폭주로 MCU 생산 리드 타임(발주부터 납품까지의 소요시간)이 기존 12∼16주에서 26주∼38주까지 늘어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TSMC는 전세계 MCU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차량용 반도체는 최대 위탁 생산업체인 TSMC의 작년 4분기 매출의 3%를 차지하는 데 그칠 정도로 수익성이 낮고, 사용 조건이 까다로워 개발부터 양산까지 10년 가량이 소요된다. 다른 반도체보다 높은 안전성과 신뢰도가 요구돼 NXP, 르네사스, 인피니언, ST마이크로, 마이크로칩 등 일부 기업만 차량용 반도체를 공급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국내 자동차 업계는 차량용 반도체의 98%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으며, MCU 등 주요 품목의 국내 공급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구원은 이미 글로벌 강자들이 견고하게 자리 잡은 MCU 중심의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진입하기보다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와 같은 고성능 반도체 시장에서 기회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현재 자동차에는 1대당 40여개의 MCU 기반 분산처리형 전자제어장치(ECU)가 탑재되고 있다. 하지만 향후 5∼6년간 전기차와 자율주행차로의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AP 기반 집중처리형 고성능 제어기를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AP 기반 집중처리형 고성능 제어기는 1대당 3개 이상이 탑재될 것으로 예상된다.

연구원은 차량용 반도체가 AP와 같은 범용 통합 칩으로 대체되면서 도심항공모빌리티(UAM)와 개인용 비행체(PAV) 등에 확대 적용된다면 충분한 수요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울러 고성능 반도체 시장의 미래차 기술 연구개발에 글로벌 기업들이 나서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와 반도체 업체의 협력을 통해 인공지능(AI)·보안·데이터 등의 시장에 도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인텔은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한 차량용 시스템온칩(SoC, 여러 기능을 가진 시스템을 하나의 칩에 구현한 기술집약적 반도체)을, 테슬라는 자율주행차용 AP를 개발하고 있다.

나아가 차량용 AP는 개발 기간이 오래 걸리고, 사용 주기가 10년이 넘어 지속적인 관리와 업그레이드가 필요한데다 엄격한 안정성 검증이 요구되는 만큼 업체의 부담이 커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기에 차량용 반도체 수급 불균형을 계기로 반도체 공급망을 아예 자국 중심으로 바꾸기 위한 미·중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목된다.

미국과 중국 모두 우리에게는 중요한 생산기지이자 판매처다. 올해 3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17.7%로 가장 높다. 1분기(1~3월) 반도체 수출만 보면 대중국 비중이 38.5%에 이르고, 대 미국 비중은 7.1%다. 이에 우리 기업들은 두 강대국의 패권 다툼 속에서 한쪽의 선택을 강요받은 곤혹스러운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삼성전자 12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이 주요 반도체·완성차 기업들과 최근 반도체 부족 사태에 대한 긴급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회의 자리에 초청받은 상태다.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는 미국이 삼성전자의 미국 내 신규 투자를 요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 백악관은 세계적인 반도체 품귀 현상에 대처하기 위해 이날 화상으로 개최하는 반도체, 자동차, 테크기업 CEO 서밋을 연다. 

서밋에는 삼성전자와 대만 TSMC, 구글 모회사 알파벳, AT&T, 커민스, 델 테크놀로지, 포드, GM, 글로벌 파운드리, HP, 인텔, 메드트로닉, 마이크론, 노스럽 그러먼, NXP, PACCAR, 피스톤그룹, 스카이워터 테크놀로지, 스텔란티스 등 19개사가 참석한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독보적인 세계 1위이며,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는 대만 TSMC에 이어 2위다.

미 당국자들과 기업인들은 미국의 일자리 계획, 반도체 및 기타 주요 분야에 대한 미국의 공급망의 복원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논의한다. 미 정부는 반도체 칩 문제에 대해 최고 수준에서 상당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공급망 조사 이후 어떤 액션을 취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만큼 우리도 미국처럼 반도체 공급망 상황을 파악해 미국의 행동과 관련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준 산업연구원 소재산업실장은 "미국이 중국 및 홍콩으로 60%가 가는 메모리반도체 물량을 중국 기업에 팔지 말라고 한다든가, 중국 기업을 상대로 반도체 장비를 공급하지 말라고 한다든가 할 경우엔 대응하기가 어려워진다"며 "미국은 앞으로 계속 중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을 이어갈 전망으로, 우리 정부는 이를 인식하고 좀 더 장기적으로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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